베를린, 알바니아북마케도니아 여행 때 만들어진 클리셰 ‘금요일 8시에 독일어수업 듣고 출발하기’가 이번에 깨졌다. 독일어수업이 9시반에 끝나는데 비슷한 시각에 켐튼에서 기차가 출발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Englisch 교수님이 갑자기 팀플과제를 내셨는데 기간을 일주일 주셔서 졸지에 여행지에서 팀플해야 하거나 끝나고 집에 오자마자 과제해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비교적 다행히도? 후자가 되었다)
시작부터 꼬여버림
아무튼 켐튼역에 갔고, 약 15분의 매우 전형적인 연착 후 9시 42분에 기차가 출발했다. 기차를 탄 나는 한 시간 넘게 열심히 챗지피티와 함께 Englisch 과제를 준비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뿔싸! Sonthofen에 와 있었다. 플릭스버스 정류장이 있는 린다우와 반대 방향으로 온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가? 탈 때는 분명 7번이었는데 내리고 보니 기차에 17번이라고 적혀 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어떤 바보같은 인지적 오류를 저지른 것인지 확인할 필요는 없다. 어찌 됐든 망했다는 사실 한 가지는 확실하니까.
지푸라기라도 줍는 심정으로 Sonthofen 기차역 베이커리 주인한테 택시 잡을 곳 있냐고 물어봤다. 주인은 창밖에 택시들이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린다우까지 택시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봤다. 기사님은 계산기를 두드리시더니 160이라는 숫자가 찍힌 것을 보여주면서 ein hundert…로 시작하는 숫자를 말하셨다.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어봤더니 친절히 계산기를 다시 두드려서 다시 그 세 자리 숫자를 보여주셨다. 엄청난 금액임에도 정신이 아득해져 있는 상태라 일단 “오케이” 하고 플릭스버스 출발 시각인 11시 20분까지 갈 수 있는지 여쭤봤다.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으셨다. 이런 지리 감각 1도 없는 나 같으니라고.
그래서 플릭스버스는 물 건너갔다. 보통 여행에서 가장 부담되는게 항공편 가격이라면 그 반대로 이번 스위스 여행에서 가장 싼게 독일-스위스 왕복이었는데. 그렇게 린다우에서 취리히로 가는 플릭스버스 표를 날리고, 대신 취리히로 가는 ECE를 예매했다. 145유로에. 돈과 함께 멘탈이 탈탈 털린다.
Sonthofen에서 기차 하나를 타고 (이 와중에 연착돼서 타기로 한 ECE를 놓쳐 다음 것을 타야 했다.) ECE를 타는 멤밍겐 역에 갔다. 근데 정말 우연히도 켐튼 친구를 거기서 만났다. 승강장을 향해 걷고 있었는데 별안간 ‘Anyeong’이 들린 것이다. 무심코 ‘이건 니하오여야 하는데?’ 생각했는데 돌아서서 보니까 그 사람이었다. 켐튼에서 코딩 튜터를 해야 해서 켐튼으로 가고 있었다고. 무슨 프로그래밍 언어 하는지, 한국과 독일의 산 비교, 내 독일어 B1 수업, 내 처지 등에 대해 짧게 대화를 나눴다. 내가 “I’m broke now” 하니까 진심으로 불쌍해해 줬다.
그 친구가 켐튼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내 기차를 기다리는 한 시간 내내 할머니에게 영상통화로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할머니는 20년 전 스위스에 패키지로 갔을 때 산꼭대기에서 컵라면을 먹은 얘기, 스위스는 기차 안에 음식점이 있더라는 얘기 등을 하셨다. 기차 안에 음식점이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기차가 아니고 여행사에서 빌린 특별한 차였겠지, 생각했는데 실제로 기차 안에 레스토랑이 있더라는.
2등석에 꼬리꼬리한 빵, 치즈 냄새와 독일인인지 오스트리아인인지 스위스인인지 모를 승객들로 가득 찬 145유로짜리 ECE는 어느새 국경을 넘어 취리히로 향했다. 독일 기차역에서 가끔 보이던 <+> SBB CFF FFS 가 적힌 기차였다.
여기서 잠깐. SBB CFF FFS가 뭔뜻인지 아는가?
세 개 전부 ‘스위스 연방 철도’의 약자이다! 근데 이제 SBB는 독일어 (Schweizerische Bundesbahnen, CFF는 프랑스어 (Chemins de fer fédéraux suisses, FFS는 이탈리아어 (Ferrovie federali svizzere)인 거다.
와. 그 세가지를 로고에다가 그냥 병렬한 거야…? 공식언어가 4개라서 병렬 배치하느라 그리드 시스템이 발달하게 됐다는 것은 시각디자인 학부생으로서 알고 있었지만 로고에까지 무심하게 ‘턱’ 3가지 언어를 한번에 넣다니. 와. 진짜. 특이한 나라다. 진짜 이상한 나라다.
Zürich HB
취리히역. 발도 조심조심 딛어야 할 것 같은 ‘비싼 나라’ 스위스에 도착했다.
취리히 역 화장실에는 깔쌈한 디자인의 디지털 문이 있다. 1.5프랑을 (1.6유로) 내야 들어갈 수 있다. 비싼만큼 화장실 시설이 좋긴 했다. 하지만 기껏해야 1-2분 머물 공간에 1.6유로를 내야 한다니 너무하잖아. 노숙자도 없으면서.
4번 트램을 타고 도시로 나가는 도중 지나친, 실수하지 않았다면 2시간쯤 전 내가 내렸을 플릭스버스 정류장을 지나간다. 훗날 다시 독일로 돌아갈 때 플릭스버스를 탄 곳이기도 하다.
인스타에서 스크롤하다 몇 번 봤던 포스터가 빳빳한 종이라는 실체를 가진 채 내 눈 앞의 벽에 붙어있는 걸 목격한다.
취리히 시청 근처 한 골목에서 같이 여행하는 언니를 만난다. 산이 많아서 그런지 스위스 골목에는 계단이 꽤 많다. Fraumünster 교회와 그 옆의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구경한다.
라끌렛
Raclette Factory라는 근처에 있던 음식점에 가서 스위스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외식을 한다. 스위스 음식이라는 라끌렛이다. 치즈를 녹여서 얹은 거다.
미디어 영향으로 퐁듀가 고급음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원래 서민들이 남은 빵이랑 남은 치즈 처리하려고 난로에 옹기종기 모여서 먹던 음식이라고 한다.
저 감자와 피클의 배치에서 내 신입생 시절 작업물 하나가 생각난다.
나와서 숙소가 있는 인터라켄으로 가기 위해 역으로 이동한다.
도중에 들른 기념품샵에서 굴림체를 발견한다.
승강장에 도착한다.
기차역은 스위스에서 가장 독일같은 부분이다. 스위스 기차가 독일 역에서 종종 보이기도 하고, 안내방송이 독일어로 나오기도 하고, 기차역 특유의 냄새가 나고, 그래픽 시스템이 독일과 다르면서도 꽤 비슷하고(특히 색깔이), 기차역이라는 특성상 투박한 장소라서 스위스를 독일과 구분하는 ‘깨끗함’과 ‘섬세함’이 좀 묻히기 때문이다.
기차에 타서 언니와 스위스와 독일과 알바니아 등에 대해 얘기한다. 스위스 마트들 중 그나마 좀 싸다는 coop 마트에서 내일 아침으로 먹을 요거트를 구매한다.
Alplodge 숙소는 취리히와 좀 떨어진, 스위스 중부 쪽의 인터라켄에 있다. 원래 9시반에 체크인 마감인데 우리를 위해 10시까지 있으셨다고. 리셉션에서 체크인을 하고, 카드키를 받고, 방에 들어가서 짐을 풀고 얼굴만 씻고 옷 갈아입고 잠에 든다. 4인 혼성 도미토리였고, 주방은 꼭대기층에, 화장실은 4개 정도가 중간중간에 있고, 소파와 테이블이 놓인 공용 공간이 가끔 있다. 나는 2층이 좋아서 2층침대로 올라갔다. 침대마다 무선충전패드와 USB 충전소켓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