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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7

갑자기 혼자 등산을 가게 된 경위

5월 27일 화요일, 아침 7시 반에 일어났다. 공강이고 과제와 발표도 다 끝나서 집에서 혼자 할 일이 없다. 8시에 무작정 집을 나서서 언젠가 한 번 더 가보기로 했던 Immenstadt의 산길을 향해 출발한다. 오리엔테이션 때 학교에서 다 같이 첫 하이킹을 갔던 곳이었다. 포장도로고 짧아서 하이킹보다는 산책?에 가깝지만. 경치는 이후에 간 오스트리아나 스위스의 산들에 비해 특별하진 않았지만, 하산 후 산 아래 아이스크림 집에서 맛보았던 Waldmeister맛 아이스크림이 기억에 남았기도 하고 꼭대기에 있는 오두막집 음식점에서 사과주스밖에 안 먹어본게 미련이 남아서 가기로 했다. 목표는 뚜렷하게 산 아래의 아이스크림 가게와 산 위의 오두막 음식점을 가리켰다. 등산은 그저 커리부어스트와 아이스크림 중간에 낀 깍두기였다.

항상 어떤 핵심적인 욕구 한 가지에 의해 일상이 돌아간다면, 요즘 나에게 가장 큰 욕구는 식욕이다. 그렇다고 먹는 양이 이전보다 더 많아진 건 아니다. 처음으로 자취를 하게 되며 무엇을 언제 먹을지 전적으로 내가 관리하다 보니까 ‘식욕을 조절’한다는 개념을 의식하기 시작해서 ‘식욕이라는 것의 존재’도 의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 뭔가를 먹겠다는 의지가 나를 움직인다. 예를 들어 방 밖에 나갈 일이 없는 하루, 불닭볶음면을 사겠다는 명분으로 걸어서 30분 거리의 마트까지 산책을 다녀오고, 오늘도 아이스크림 먹겠다고 등산을 다녀오게 된 것처럼. 점점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니는 범위가 넓어진다.

원래 어제 가려고 했는데 비 와서 못갔다. 그리고 사실 오늘도 날씨앱에 오전에 몇 시간 비 온다고 적혀 있었는데 그냥 갔다.

이동

켐튼에서 이 등산로까지의 이동 방법은 기차 -> 버스버스 -> 버스 두 가지가 있는데 저번에는 버스로만 갔지만 아침에는 그 버스가 안 다닌다. 기차를 타기 위해 켐튼역에 갔다. 항상 기차 시간보다 30분정도 일찍 가는데 기차 연착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더 추가돼서 켐튼역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RE를 타고 켐튼에서 15분 정도 가서 Immenstadt 역에서 내린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가 어느 승강장에 오나, 무슨 버스가 언제 오나 계속 기웃거려야 한다. 버스는 구글 맵과 DB 앱에 적힌 시간이 지나도 안 온다. 막 출발하려는 봉고차 마을버스에 가서 Ratholz 가는지 물어봤더니 이 버스가 아니라 Zwei(2번 승강장)에 Neun Uhr dreizig? dreizehn? (9시 30분? 13분?)에 버스가 올 거라고 알려주셨다. 이렇게 숫자만이라도 알아들으니 좋다. 버스는 30분도 13분도 아닌 더 이른 시간에 도착한다. 승객은 나 혼자다.

이 시골의 배차간격이라면 버스를 한 번 놓치면 한 시간은 기본으로 추가된다. 티라나 버스에 대해 불평할 게 아니다. 여기도 정류장 표시가 제대로 안 되어 있을 때가 많고 버스가 언제 오는지 보장 따위 없다. 원래 이게 기본인데 내가 서울 도심의 전광판 달린 버스정류장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구글 맵과 DB 앱은 항상 다른 시간을 가리킨다. 보통 둘 다 틀린다. 더 빨리 올때가 많다(혹은 이전 버스가 늦은 거거나). 마치 수강신청 때 네이비즘과 네이버시계가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켜도 일단 켜놓는 것과 같이 일단 두 앱 모두 켜 놓고 기다린다.

Ratholz, Alpsee Bergwelt 정류장에 내린다. 비가 온다. 등산로를 오르기 시작한다. 9시 30분이다.

길은 좀 경사진 포장도로 또는 자잘한 자갈길이다. 지그재그로 난 산길을 50-60분 걷다 보면 리프트 도착/출발 지점, Alpsee 코스터 출발지점, 놀이터, 호텔, 음식점, 카페, 알파카 목장, 클라이밍 장소 등이 있는 목적지에 이른다.

학교에서 다같이 갔을 때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탈이었다. 너무 해가 나고 더웠다. 몇 분 걷자 얼굴이 시뻘개졌고 정상에 올라갔을 때 세수한 것처럼 얼굴이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근데 오늘은 비가 와서 오히려 좋았다. 저번보다 훨씬 가뿐하게 올라갔다.

비가 오고 이른 시간이라 등산객이 별로 없었다. 올라갈 때 사람을 두 번 보고, 내려갈 땐 좀 더 봤다.

등산로에서 소를 발견했을 때 대처 가이드. 이걸 볼 때만 해도 정말 등산로에서 소를 마주치게 될 줄 몰랐다.

10시 반쯤 꼭대기에 도착해서 20분 걸린다는 Rundwanderweg 둘레길을 걸어본다. 저번에는 여기 도착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쪄 죽을 것 같아서 못 갔었다.

저번에 사과주스를 마셨던 오두막 식당이 보였다. 식당 화장실을 이용한 후 식당에 들어가려 하니 내부 공사 중이었다. 근데 직원들은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Ist es offen? 열었냐고 물어보니까 geschlossen 저긴 닫았는데 여기서 (손으로 포장마차 같은걸 가리키며) 시키면 된다고 함.

메뉴는 자릿값 때문인지 다 비쌌다. 커리부어스트를 한 번도 안 먹어봐서 시켰는데, 12.9유로인가 했다. 같이 나오는 거 감튀와 샐러드 중 고르라길래 감튀 했다. 맥주를 먹으려 했는데 4.5유로로 너무 비싸서 spirits라는 게 3.5유로길래 2cl짜리(스몰) haselnuss를 시켰다. 단위가 ml, l가 아닌 cl인걸 봤지만 호기심에 시켜버렸다. 점원이 독일어로 ‘이거 알코올인데 맞냐’고 한 번 더 물어봤는데 그냥 Ja 했다.

역시 spirits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쬐끄만 유리병에 투명한 알코올램프 농축액 같은 게 담겨서 나왔다. 페트병에 담아온 물이 있어서 점원분한테 Kann ich das mit Wasser trinken? 이거 물 섞어먹어도 되는거예요? 여쭤봤더니 물 타서 먹어도 되고, 어떤 사람은 그냥 마신다고 (원샷하는 흉내 내며) 하셨다. schnapp이란 단어가 두 번 들렸는데 나중에 검색하니 샷이라는 뜻이었다.

물을 타기 전에 마셔 봤는데, 맛은 술이고 향기는 초콜릿이었다. 대충 컵 크기에 맞추면 되겠지? 하고 컵을 꽉 채워서 물을 부어 버렸더니 완전 밍밍해졌다. 그래도 다 마셨다. 점원분이 커리부어스트를 가져오시고 소스 케찹, 마요네즈 중에 뭐할거냐 해서 케찹 했더니 작은 병에 케찹을 받아오셨다. 감튀에 찍어 싹싹 긁어 먹은 후 다른 소스도 종류별로 담아서 찍어먹었다.

음식값이 비싸니 경치와 공기라도 즐기며 오래 앉아있기로 했다. 부어스트가 다 식어 딱딱해지고 감자튀김이 퍽퍽해지도록 가져온 책을 읽으면서 최대한 천천히 음식을 깨작거렸다. 손님은 두 그룹밖에 더 오지 않았다. 코스터도 전에 왔을 때는 줄이 있었는데(우리 학교에서 단체로 온 사람들 제외해도) 줄이 없었다. 그래도 타고 내려가는 사람은 좀 있었다. 어느새 비가 그쳐서 리프트를 타고 올라오는 사람이 조금씩 보였다. 12시에 그릇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산을 시작했다. 올라온 것과 똑같은 길이다.

올라갈 때 울타리 너머에 있었던 소들을 등산로 한복판에서 마주쳤다. 반대편에서 올라가던 등산객들이 웅성웅성 조심조심 옆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도 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용히 지나갔다. 소들이 나를 크고 검은 눈으로 빠안…히… 쳐다봤다. 내가 지나가고 나자, 내가 가는 방향이 원래 소들이 가던 방향이었는지 내 쪽으로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내려와서 진 목표였던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뭔가 그때 맛이 안 났다. 그리고 1유로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2유로였다. 그렇게 모든 미련 해소를 완료했다.

버스정류장에 앉아서 또 기약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등산복을 입은 노부부가 왔다. 할머니가 나한테 Sie warten auch der Bus? (당신도 버스 기다리고 있어요?) 물어보셔서 Ja 하니까 곧 올거라고 말하셨다. 여기서 돌아다니면 모두가 내가 독일어를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하고 독일어로 말을 걸어온다. 근데 외국인처럼 생겼다고 외국인 취급하면 그거대로 논란의 여지가 있으니까 이게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