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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2

아침에 일어나서 여유롭게 씻고 나갈 준비를 마친다. 호스텔 테라스의 흔들의자에 앉아도 보고, 창밖의 빨래 널린 골목 뷰를 감상한다. 여행 떠나기 전만 해도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쓰여 있었는데 어째선지 비는 오지 않는다. 오늘은 티라나에서 버스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해변가 도시 두러스 Durrës에 가는 날이다. 가기 전에 티라나 유명지들을 몇 곳 둘러보기로 한다.

보다폰 거리를 지난다. ‘Together We Can.’ 독일에 오고부터 시작된 스포티파이 광고가 머릿속에서 자동재생된다.

Pyramid of Tirana

피라미드 오브 티라나. 원래 1988년 알바니아 공산주의 독재자 Enver Hoxha 기념 박물관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1991년 공산주의 붕괴 이후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중단했고, 철거 제안이 승인되었으나 2013년 티라나 시민 대다수가 철거에 반대했다. 그래서 원래 애들이 미끄럼틀 탈 정도로 매끈했던 벽을 계단으로 바꾸어 개조했다고 한다.

근데 왜 이런 재밌는 얘기를 눈에 띄게 써놓지 않았을까? 베를린이었다면 옆에다가 벽 세워놓고 연도별 사진과 설명글을 도배해놓고 ‘읽어!!!’ 했을텐데 말이다. 올라오니 티라나 경치가 한눈에 보인다.

Tirana Castle

티라나 캐슬. 비잔틴 시대의 유적으로, 옛 요새 터 안에 관광객들을 위해 지어진 카페나 기념품가게들이 있다.

둘 다 어제 두 차례의 저녁식사가 얹혀서 아침을 먹을 수 없다. 근처 카페에 들어가서 쬐끄만 커피와 쬐끄만 하트 모양의 달달한 케이크를 먹는다.

티라나에는 재미있고 추상적인 조형물, 의자들, 벽화들이 많다. 횡단보도도 특이하다.

티라나는 한때 공산주의 때문에 프로파간다를 제외한 모든 예술이 금지되었었다. 2000년대 초반 공산주의의 과거를 떨쳐 내려는 움직임과 함께 거리 예술가들이 등장하며 티라나 거리예술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 예술가들은 잿빛 공산주의 건축물로 가득했던 티라나를 세상에서 가장 알록달록한 도시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시민들을 참여시키는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티라나의 거리 예술은 정치적 표현의 수단이기도 하다. 정치 인사, 시위, 상징적 이미지들을 도시 전체에서 발견할 수 있다. 1

다음 행선지로 가는 중 길거리 작은 편의점에서 먹을 것을 사다가 Friendship Monument를 발견한다. 쿠웨이트와의 Everlasting 한 우정을 저도 기원합니다.

Bunk’Art 2

Bunk’Art 2. 학생 할인은 로컬 학생들만 된다고 해서 성인 요금 900레크(약 9유로)씩을 내고 티켓을 받아 들어간다.

베를린 스토리 벙커처럼 옛 벙커를 박물관으로 조성해 놓았다. 알바니아의 근현대 역사 전반에 대해 다루고 있는 전시다.

공산주의 때의 프로파간다, 심문 중 행해졌던 고문 등에 대해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독재정권이나 동독 공산주의 정권이 자행했던 탄압이 평행선처럼 그려지면서 새삼 독재의 역사가 없는 나라도 드물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씩 다르지만 비슷비슷한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곤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옆에는 clock tower of tirana가 있다. 200년 전 오스만 때 지어졌고 터키 기관에 의해 복원되었는데 몸통은 오스만 스타일이고 꼭대기는 베네치아 스타일을 하고 있다. 2

Book building이다. 책갈피가 가득 끼워진 책의 옆면 같다고 이름이 book building이라는 사실이 귀엽다. 티라나 현대화 프로젝트의 일부분이었다고.

티라나는 ‘No Time to Rest’라는 슬로건 아래 도시 경관을 대대적으로 뜯어고쳤다. 티라나에는 1938년에 지어진 ‘National Theater’가 있었다. 알바니아 작가, 예술가 연합이 창립된 곳이자 Enver Hoxha의 전체주의에 반대한 인물들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던 그 건물은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 이후 시민들의 극장이 되었다. 격렬한 시위에도 불구하고, 이 극장은 2020년 5월 17일 새벽의 마지막 공연 후 같은 날 철거되었다. 대신 광장에는 새로운 극장과 마천루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인한 급격한 정치적 변화는 인프라가 부족한 도시에 시민들이 직접 공공 장소들을 만드는 문화로 이어졌지만 그것은 계획된 수도를 만들고자 하는 관료들과 끊임없는 충돌을 일으켰다. Edi Rama 시장은 강가의 키오스크들을 걷어내고 건물 외벽에 알록달록한 패턴을 페인트칠했다. 도시 계획가 Sotir Dhamo는 이런 개입을 Urbicide, 즉 도시에 대한 폭력이라고 묘사했다.

티라나 2030 계획을 위한 회의는 원래 공개회의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공개토론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공동주택의 철거는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재건축 지역에서는 주민들의 생활비가 증가하고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난다. 3 내가 티라나에서 느낀, 물에 유화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다채롭게 잘 꾸며졌지만 어딘가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의 책임이 여기에도 있지 않을까?

내가 최근에 갔던 나라인 독일과 홍콩의 신호등을 자주 비교하게 된다. 독일은 아무 소리소문없이 신호가 휙휙 바뀌며, 이제 건너기 시작하지 마세요(하지만 건너던 사람은 마저 건너세요) 라는 것을 깜박거림도, 노란불도 아닌 갑자기 빨간불로 바꿔버리는 것으로 표현한다. 반면 홍콩 신호등은 시도때도없이 땡땡땡땡 소리를 질러대며, 건널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땡땡땡 소리의 간격으로 표현한다. 시간이 다 되어 갈수록 빨리 건너라고 호들갑스럽게 독촉하는 듯하다.

알바니아의 신호등이 우리나라와 가장 유사했다. 초록불/빨간불 각각 몇 초 남았는지 보여주는게 말이다. 여유로워 보이는 티라나 사람들도 빨간불이 10초 남았을 때부터 건너기 시작한다.

티라나와 스코페의 버스는 다 독일제인 것 같다.

두러스에 가는 버스는 East Bus Terminal에서 출발한다. 터미널에 가기 위해 또 버스를 탄다. 버스는 구글맵으로 검색할 수 있으나, 거기 찍히는 시간은 믿으면 안 된다. 전혀 상관이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버스에 행선지와 버스 번호가 안 적혀 있으니 눈치껏 타야 한다. 우리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주민들은 아무런 문제 없다는 듯이 잘 타고 다닌다. 우리는 모르는 버스 시스템이 내부자들끼리는 이미 공유되어 있는 건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나의 길 찾는 방법이 완전히 달랐던 것이 생각난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explicit하고 구체적인 정보를 어딘가에서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 대신 동네의 노선도와 길을 이미 꿰뚫고 계시거나, 모르면 행인에게 물어 물어 길을 찾고, 처음보는 택시기사와 친구처럼 말을 섞으며 정보를 나눈다. 읽기보다 말하기 위주의 사회였던 것이다. 대신 노선도를 내재하고 계신 자신의 동네를 벗어나는 것을 스트레스로 여기신다.

세대가 겨우 두 번 바뀌었을 뿐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학교에서 듣는 수업에 부모님이 코소보 사람인 학생 두 명이 있다. 부모님께서 독일로 이주하셔서 독일에서 태어났다고 하고, 스스로를 독일인으로 정의한다. 같은 나라 안에서의 세대 차이도 이렇게나 큰데, 아예 대표적인 저맥락 사회인 독일로 이주한 그들이 느끼는 세대 차이는 더 크지 않을까?

타서 앉아 있으면 검표원이 돌아다니면서 현금을 받고, 몸에 차고 있는 돈가방에서 돈을 거슬러주고, 티켓을 하나 뜯어서 준다. 그리고 좀 있다가 다시 돌아다니시면서 승객들이 들고 있는 티켓을 가져가서 사용된 티켓이라는 표시로 조금 찢어서 다시 돌려준다. 늘 ‘없어진 직업’의 예시로 배우던 검표원을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누가 뭐래도 이 부분이다.

East Bus Terminal of Tirane

East Bus Terminal에 버스 시간보다 30분쯤 일찍 도착해서 구글맵이 가리키는 터미널을 향해 걷는다. 웬걸, 버스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웬 콘크리트 기둥과 철근들이 서 있는 공사판이 나오는 것이다.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터미널의 순찰복 같은 걸 입으신 할아버지는 저 쪽으로 가라고 한다. 그래서 저 쪽으로 갔더니 웬 호텔 주차장이 나오는데, 그곳의 사람 좋게 웃는 경비원 아저씨는 갑자기 우리에게 바디랭귀지로 소통을 시도하지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우리와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한 키 큰 사람에게서는 뜻밖에도 Nein 이라는 답이 되돌아온다.

일말의 희망을 품고 울타리를 따라 걸으니 이런 처참한 폐허가 나온다. 없는 길을 개척하며 고난의 행군을 하던 도중, 붉은 울타리 너머로 버스들이 보인다. 그 울타리를 넘는 사람도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불가능이라고 판단하고 가던 대로 계속 걷는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버스 터미널에 들어온다… 버스비는 200레크(2유로)이다.

Durrës

두러스에 도착한다. 독일어를 말한다는 택시를 보고 반가워서 찍어본다.

한 과일가게에 들어간다. 용과, 복숭아 등을 하나씩 집어서 가져가니 가격을 매겨주는데, 생각보다 비싸서 당황한다. 카운터에 수상하게 생긴 작고 무르고 부숭부숭한 납작복숭아 바구니가 놓여 있다. 유럽 납작복숭아가 그렇게 달다길래 하나씩 사서 씻지도 않고 한입 베어문다. 음… 그냥 복숭안데?

베네치아 타워. 들어가려면 돈을 내야 한다.

1939년 침략한 이탈리아와 싸웠던 Mujo Ulqinaku라는 자의 동상. 두러스가 이탈리아랑 지리적으로 엄청 가깝긴 하다.

해변가에는 휴가 나온 비둘기들이 여유롭게 노닐고 있다. 땅에 있는 저 키위 뭉치들은 정체가 무엇일까. 답을 발견했다.

버스 터미널에서 한바탕 한 바람에 약간 영혼이 털린 상태로 하얗게 내리쬐는 햇빛과 열대 나무들을 감상한다.

그래피티로 뒤덮이고 창문이 깨져서 내부가 드러난 상태로 방치된 이상한 건물들과 지중해의 바다와 열대 나무… 90년대의 상업화와 개발 전 경관이 더 인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독일에서는 보기 힘든 해산물을 먹는 것이 목적이다. 택시를 타야 하는 거리에 있는 맛집에 가려 했지만, 택시가 바가지라서 타지 못하고 횡단보도 언저리에서 근처 식당을 검색한다.

Pastarella

2층 식당 Pastarella에 들어온다. 식당 한가운데 수족관이 있고 천장에 거울이 달려 있는 등 인테리어가 독특한 곳이다. 휘발유 냄새가 나는 초록색 기름과 후추와 분홍 소금이 배치되어 있다. 내가 저 후추 병에서 어떻게 후추를 나오게 하는 건지 알아내려 노력하는 것을 보고 직원이 내 접시에다가 후추를 친히 뿌려 주며 알려준다. 후추가 뿌려진 접시에 손가락을 찍어 맛보려는데 접시를 바꿔 주려고 해서 괜찮다고 한다.

Monument of Unknown Soldier

이탈리아 식당의 창밖으로 이탈리아와 맞서 싸우는 동상이 보인다.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지중해를 이탈리아 해로 만들고 싶어했고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것에 대한 경쟁의식으로 지중해 식민지를 갖고 싶어했다. 그래서 알바니아 국왕에 항복 협정을 제시했지만 국왕은 서명을 미뤘다. 그래서 1939년 이탈리아군은 두러스를 포함한 네 개의 알바니아 해안에 상륙한다. 두러스의 저항이 가장 거셌다. 4

그렇다고 현재 두러스가 이탈리아에 적대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오히려 이탈리아 색이 도시 전반에 매우 진하다. 아까 베네치아 타워도 있고. 이탈리아 음식점도 엄청 많다. 역사적으로 이탈리아에 ‘아르버레셔’라고 불리는 큰 규모의 알바니아인 공동체가 있기 때문에 알바니아와 이탈리아의 관계는 대체적으로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5 그것이 이탈리아가 알바니아 해안에 상륙했을때 큰 저항이 없었던 이유일까? 그리고 물론 관광지화, 상업화의 영향도 이탈리아 음식점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데 기여를 했을 것 같다.

애피타이저로 식전빵과 올리브가 나온다. 맛있다. 아직도 위장에 얹혀 있는 어제의 저녁식사를 잠재우기 위해 쌀 종류를 주문한다. 새우 리조또이다.

Monument of Unknown Soldier의 흰색 계단 같은 조형물에 기대어 일광욕을 하다가 어린아이가 와서 언니에게서 과일을 구걸해 간다. 알고 보니 부모가 근처에 있는데 말리지 않는다는 게 충격적이다. 해변에는 가지 않고 티라나에 돌아가기로 한다. 다시 돌아간 버스 정류장 근처 작은 편의점에서 음료를 산다. 둘 다 70레크다. 앞에 가는 아줌마가 사길래 나도 따라서 미스테리한 흰 병을 구매한다.

이 때 맛본 Dhallë의 시큼 짭짤 텁텁한 맛을 잊지 못해서 이번 여행 중 2번이나 더 사먹었다. 원래 3번이 될 뻔했는데 그때 현금이 없고 폰도 꺼져서 못 사먹었다. Dhallë의 다른 이름은 아이란인데, 중앙아시아, 발칸반도, 터키, 이란에서 마시는 음료수로 주 재료는 요거트, 물, 소금이다. 알바니아에서 아이란을 부르는 이름인 Dhallë는 ‘섞다’, ‘흔들다’ 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6

지친 몸을 다시 200레크짜리 버스에 싣고 티라나로 향한다.

Footnotes

  1. Xu, J. (2024, January 29). Tirana’s vibrant street art and murals. Artefact. [https://www.artefactmagazine.com/2024/01/29/tiranas-vibrant-street-art-and-murals/](https://www.artefactmagazine.com/2024/01/29/tiranas-vibrant-street-art-and-murals/

  2. Tirana’s Ottoman-era clock tower remains city landmark | Daily Sabah. (n.d.). Retrieved May 5, 2025, from https://www.dailysabah.com/arts/tiranas-ottoman-era-clock-tower-remains-city-landmark/news

  3. Is Tirana’s rapid transformation progress or erasure? - Dorina Pllumbi. (2022, July 14). Kosovo 2.0. https://kosovotwopointzero.com/en/is-tiranas-rapid-transformation-progress-or-erasure/

  4. Italy Invades and Annexes Albania | EBSCO Research Starters. (n.d.). Retrieved May 5, 2025, from https://www.ebsco.com/research-starters/history/italy-invades-and-annexes-albania

  5. The Arbëreshë: Italy’s Albanian Diaspora. (n.d.). The Cambridge Language Collective. Retrieved May 5, 2025, from https://www.thecambridgelanguagecollective.com/europe/the-arbereshe-italys-albanian-diaspora

  6. Ayran. (2025). In 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ndex.php?title=Ayran&oldid=12886558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