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반에 알람을 맞춰 두었는데, 더 이른 시각에 눈이 떠져 일찍 임무 수행을 시작한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체크아웃하기로 한 7시 반까지 시간이 남아 벙커 안에서 폰을 만지작거린다.
이제 정말 떠날 시간이다. 나의 정든 관짝 안녕.
체크아웃 할 때 나를 알아봐서 혹여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런 일은 없었다. 스태프는 북마케도니아를 떠날 때 쓰라고 임시 거주 증명서 같은 서류 한 장을 건네주며 친절하게도 설명해준다.
이 사람 성은 왜 프리슈티나인 걸까? 코소보의 프리슈티나와 관련 있나?
뭔가 이 사진으로 2025년 스코페의 도시경관은 설명되는듯 하다. 동상과 그래피티.
Toy Store Jumbo
버스터미널 근처의 큰 쇼핑몰이다. 아침에 온 덕에 내가 좋아하는 텅 빈 몰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마트 계산대는 텅텅 비어 있고 청소하시는 분이 돌아다닌다. 계산대는 한 곳만 운영 중이다. 버스 출발까지 시간이 많이 남아서 열려 있는 마트에 들어가 물건을 여유롭게 구경한다. 제품 포장지에 키릴문자가 쓰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박물관이나 마찬가지다.
아직 열지 않은 장난감 가게.
마트에서 과자 하나를 집어들고 나온다. 85디나르를 구글페이로 결제한다.
Skopje Bus Station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터미널에 도착한다. 어제 본 대로 창구에 가서 폰에 있는 내 플릭스버스 티켓을 보여주고, 서비스비를 구글페이로 결제하고, 영수증을 받는다. 그 영수증을 버스 승강장으로 나가는 문을 지키고 있는 분께 보여주고 나간다.
출발까지 30분 남았는데 버스가 안 보이자 조급해졌다. 창구에서 ‘4승강장’이라고 분명 들었지만, 주위 버스 유리에 ‘티라나’가 붙어있기만 하면 기사님한테 티켓을 보여주며 여쭤본다. 기사님이 이건 다른 회사라고 알려주신다.
나는 30분 전에는 버스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4승강장이 비어 있자 불안했다. 근처 히잡을 쓰고 아기를 데리고 있는 한 어머니한테 여쭤본다. 그분이 내 티켓을 봐주는 동안 아기가 순수하게 웃는 얼굴과 무시무시한 손아귀 힘으로 내 85디나르짜리 과자봉지를 앗아 간다. 날 도와주시는 대가로 준다 생각하려 했는데 좀 이따 어머니가 와서 돌려주신다. 어머니와 내가 왜 버스가 없는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승강장에 있던 몇몇 승객이 와서 나를 도와주려 한다. 결국 창구에 가서 다시 물어보는 것으로 의견이 모인다. 창구에 가서 다시 물어본다. 4승강장이라고 다시 한 번 말해 주신다. 아직 버스가 없다고하니까 ‘아직 시간이 남았다, 40분쯤엔 올 것이다’ 하신다. 하긴 너무 조급했던 것 같다.
다시 승강장에 와서 기둥에 기대어 폰을 보고 있는데 약간 까무잡잡한 피부의 한 어린 소년이 다가온다. 배가 고프다는 바디랭귀지를 하고, 아까 아기로부터 탈환한 내 과자를 가리키며 한 개만 달라 한다. 뜯어서 주기도 귀찮고, 안 주고 도망치기도 귀찮다. 사실 아기가 가져갔을 때 나는 이미 그 과자에 대한 소유 의지를 잃었다. 그래서 그냥 봉지째 줘 버린다. 소년이 두 팔로 나를 안는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등을 토닥토닥 해준다. 이렇게 달라고 한다고 턱턱 주면 애 버릇이야 나빠지겠지만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그냥 앞으로는 음식은 철저하게 가방에 넣어 숨기는 게 대책인 듯 하다. 무엇이 그들을 뻔뻔하게 만드는 걸까? 무엇이 나에게는 최후의 수단인 구걸을 그들에게는 쉽게 만드는 걸까?
정말 40분쯤에 나의 버스가 승강장에 도착한다. 기사님은 친절하시다. 버스 맨 뒷자리에 앉는다. 출발까지 남은 시간 동안 다시 터미널에 들어가서 마트에서 새로운 과자 한 봉지를 산다. 이게 삥 뜯긴 과자보다 맛있어 보여서 다행이다. 빠르게 버스로 복귀해서 맛있게 먹는다.
그리고 거기서 오지랖 넓은 한 동승자와의 에피소드가 시작된다.
한 50-60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짐을 자기도 맨 뒷좌석에 놓더니 나에게 어디 갔다올 테니까 짐 좀 봐달라고 해서 오케이 한다. 그리고 돌아와서 말을 걸기 시작한다. 알바니아인이라고 한다. 버스가 출발하고, 창밖의 자기 동생과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스코페에서 일하는 동생을 보러 몇 달에 한 번씩 들른다고 한다.
나의 국적을 묻고, 한국인이라고 하자 현재 한국의 prime minister가 ‘기명’ 이냐고 한다. 처음엔 못 알아들었는데 알고 보니 김정은을 말하는거였다. 알바니아어에서 J가 Y로 발음되니까 ‘김영’ 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김정은은 노스코리아고, 남한에는 대통령이 있으며 국무총리는 이사람이라고 검색해서 보여줬더니 ‘아~’ 한다. 노스코리안 본적 있는지도 물어본다. 그 후 수영 좋아하는지, 테니스 좋아하는지 별거 다 묻고, 자기 사적인 얘기도 다 털어놓는다. 자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갤러리 계속 보여주면서 여행 사진 자랑하고, 자기 가족들 한 명 한 명 소개하고, 자신이 가족적인 사람이라고 몇 번에 걸쳐 어필한다.
내가 며칠 전 티라나에 좀 있었다고 하니까 티라나의 야경을 보여주며 모던한 건축물이 많다고, 하지만 서울보단 못하지 않냐 이런 말을 한다. 티라나와 알바니아에 대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북마케도니아에 살고 있는 알바니아인이 많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잘못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북마케도니아도 원래 알바니아 것’ 이라고도 한 것 같다.
진심으로, 처음 몇 마디 할 땐 재미있었다. 그런데 버스 타는 내내 대화할 기세길래 적당한 타이밍에 이어폰으로 귀를 막아 버린다. 그러면 말을 안 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이어폰 뺐다 하면 말 걸고 안 빼도 30분마다 말 걸고 안물안궁인 TMI를 작렬해서 졸지에 이어폰으로 노래만 6시간 들었다. 계속 쿠키를 주려 하고(두 개까지 받고 안 먹고 거절했다) 휴게소에서 커피사준다하고(거절했다) 그다음 휴게소에선 가서 물 사라하고(거절했다) 덥다고 에어컨 켜주려 하고(거절했다) 과자 바지에 떨어진 거 알려주고(땡큐 하고 집어먹었다) 해가 거기로 갔다고 알려주고(오케이 하고 커튼 쳤다)… 끝이 없이 말을 건다.
내가 ‘영어를 잘 하지만, 악센트가 있’기 때문에 알바니아에선 영어 대신 번역기를 쓰라고 조언해 준다. ‘아니 내 영어로도 잘만 다니는데 왜 쓰지 말라는 거야 번역기가 더 불편하다고요’ 라고 할 뻔 했지만 한국에서 영어 쓰는 걸 당연히 생각하지 않듯이 알바니아어 번역기를 쓰는 게 더 편하긴 하겠지.
내가 계속 이어폰을 꽂고 있으니까 자기도 내 음악 한번 들어보고 싶다고 해서 들려준다. my dead girlfriend - hades in the dead of winter 였는데 마침 반주 중이다. 그래서 “말을 안하는 노래네?” 하길래 좀 있다가 말 하는 부분 나와서 다시 들려준다. 감상평은 ‘nice한데, 너무 nice해서 자기는 듣다 잘 것 같’단다. 어쩌라는;
과자 다먹고 딱지 접으려고 세로로 두 번 접는데, 그거 보고 있다가 갑자기 자기 달라고 해서 줬더니 묶어서 매듭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아니 내가 하려던 게 더 개쩌는데 겨우 매듭 보여주려고 뺏어간 거야?’ 약간 기분 상해서 ‘나도 비슷한거 하려고 했다’ 하고 딱지 접는거 친히 보여준다.
이런 인터랙션 하나 하나가 다 조금씩 킹받는 구석이 있었지만, 좀 덜 빈번하게 말을 걸었다면 그는 여행 중 만난 ‘오지랖 넓은 웃긴 사람’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 자주 내 개인 공간을 침범했고 결국 내 이야기의 악역이 되었다.
며칠 전 티라나에서 스코페에 올 때 들렀던 휴게소들을 다 똑같이 들렀다 간다. 북마케도니아의 마지막 휴게소가 있는 오흐리드에서 가지고 있는 모든 디나르를 써 없애기로 한다. 밀카 초콜릿을 샀는데 150디나르(1.5유로)밖에 안 한다. 낮이라 꽤 더워서 초콜릿이 흐느적거린다.
내가 그의 ‘호의’를 몇 차례 연속으로 거절하니까 그제서야 눈치 챘는지 ‘I am trying to take care of you’ 란다. 인스타 맞팔하자 해서 인스타 없다 하고, 전화번호 교환하자고 해서 거절하고, 티라나에 도착하면 같이 놀자고 하길래 거절한다. 웃으면 오해할까봐 표정 없이 ‘노.’ 확실히 말한다. 근데 도착까지 시간은 있으니까 생각해 보란다. 그 이후로도 폰으로 한복, 한옥, 한식 등의 사진을 검색해서 보여주는 등 내 관심을 끌려고 부단히도 노력한다.
티라나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인사도 안 하고 바로 내려서 앞에 같이 내린 동아시아인 여자(존재만으로 안심됐음)만 그냥 구세주처럼 따라갔더니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딱 나온다. 그 여자도 타고 나도 탄다. 휴. 따돌렸다.
티라나에 오니 갑자기 긴장이 확 풀리는 것이 느껴진다. 겨우 며칠밖에 안 있었는데도, 이전에 왔던 도시라는 게 엄청난 안정감을 준다. 북마케도니아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티라나가 스코페보다 안전하고, 친숙하고, 인간적인 느낌이다. 날씨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코페의 마지막 날은 흐리고 비가 왔지만 티라나에 다시 왔을 때 날이 개었으니까.
하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유고슬라비아 시대부터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는 브루탈리즘 건축물과 거대한 고전주의 건축물이 사람을 압도하는 스코페보다는 어딜 봐도 알록달록하고 푸르르고, 소형에서 중형의 포스트모던한 조형물들이 널려 있는 티라나가 시각적으로 더 부드럽다.
비록 둘 다 정부의 일방향적인 도시 개혁이 작용한 결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물론 나는 두 도시 모두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지만 말이다.
Dua Lounge Bar
무지 오래간만에 방문한 고향처럼 느껴지는 티라나의 햇빛을 받으며 걷다가 발견한 Dua라는 곳에 들어가서 이름이 특이한 샌드위치와 이름이 특이한 커피를 시켜 먹는다. 꿀맛이었고 천국 같았다.
아, 난 역시 도시 쥐다. 도시 문물이 좋다. 아래층을 슥 봤는데 책을 팔고 있길래 간다.
해변의 카프카 표지 심볼이 인상적이다. 그 아래 ‘편의점 여자’ 표지의 물고기 간장도 귀엽다.
한강 책도 몇 권 보인다. 나는 Three elegies for kosovo를 산다. 코소보는 가려고 했다가 여행 일정이 짧아서 못 간 나라다. 책이 작고 가벼워서 남은 일정 중 호텔이나 이동 중에 읽기 좋아 보인다. 책이 든 비닐을 들고 나오니 기분이 좋다.
Ressurection of Christ Orthodox Cathedral
첫날에 그냥 지나갔던 성당에 들어가 본다.
모스크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화려하고 경건하다.
지하에 있는 종교용품샵을 구경하러 간다. 저 오너먼트 스티커랑 줄줄이 꿰어진 십자가 약간 탐난다.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그런지 정교와 이슬람의 비주얼이 닮아 보인다. 정말 그런가?
알바니아에는 기독교와 무슬림이라는 두 종교가 있지만 둘은 강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내가 읽은 글에서는 ‘알바니아인들이 다른 발칸 국가들처럼 지배적인 종교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민족주의’ 라고 주장한다. 공통된 알바니아어와 고대 일리리아 문명에서 시작된 공유된 역사적 경험은 알바니아 민족성을 하나로 묶는 접착제와 같다. 무슬림과 기독교인 혼혈이 빈번하게 있고, 종교적 규율은 그다지 강하지 않으며, 종교적 인물보다 스칸데르베그 장군이나 마더 테레사 같이 민족적 영웅의 역할이 더 강하다. 1
Vanilla Sky Boutique Hostel
예약한 호스텔을 찾아간다. 3층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니 문이 열린다. 나른한 목소리에 영어 발음을 무지하게 뭉개는 스태프가 나를 맞는다. 6인 여성 도미토리 2박 현장 결제를 하고 내 방과 내 침대, 화장실 위치, 주방 이용안내를 알려준다. 사물함 열쇠를 준다. 이때 중앙문 번호와 와이파이 비밀번호가 적힌 종이를 받았어야 했는데 까먹으신 건지 나중에 다른 스태프로부터 받았다.
도미토리 중 가장 럭셔리한 도미토리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아주 만약에 티라나 간다는 사람이 있다면 여기 가라고 하고 싶다. 2박에 23유로인데 깨끗하고 시설 좋고 위치도 좋다. 항상 2층 침대에서 자 보고 싶었는데 처음으로 2층을 걸려서 더 좋았다.
이 안내문에서 친절함이 묻어나오지 않는가? 본문용 폰트로 저걸 쓰는 사람은 성격이 안 좋을 수가 없다.
혼자 다니니까 안전을 위해 저녁에 일찍 들어왔고, 2층침대에 누워 폰을 충전하며 한 손으로 가벼운 책을 들고 읽는 낭만을 만끽하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들어오고, 11시쯤 누군가 불을 끄면 나도 책을 덮고 그대로 자는 거다.
Footnotes
-
Ivri, N. (2015, October 3). The Balkans: Rich Muslim tradition, lax observance. Mida. http://en.mida.org.il/2015/10/03/the-balkans-rich-muslim-tradition-lax-observance/ ↩